전등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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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 다섯 번째 크기를 가진 섬 강화도, 중부지방 전역의 물을 한데 모아 오는 한강과 임진강 그리고 예성강이 합해져 서해바다에서 만나는 물머리를 막고 있는 이 섬은 예로부터 한반도의 중심부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주목되었을 뿐만 아니라 단군의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 세 왕자에게 각각 한 봉우리씩 맡아 쌓게 하였다는 삼랑성(三郞城)이 있는 민족의 성지이기도 합니다. 강화도의 주봉을 이루는 마니산(摩利山)이 있고, 그 한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길상면 온수리에 이르러 다시 세 봉우리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정족산(鼎足山)입니다. 전등사는 삼랑성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성의 동문(東門)은 암문(暗門)이고 남문은 1977년에 복원하였는데
이 문들이 전등사의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문을 들어서 약간
경사진 산길을 따라 약 300m쯤 가면 북쪽으로 대조루(對潮樓)에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 있고, 여기서 한 단 높은 곳에 남향한 대웅보전이 이
건물과 축을 맞추어 일직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컨데 강화도가 고구려 영토가 된 것은 소수림왕 11년보다 약 100년이 지난 475년(장수왕 63)의 일로서, 아직 백제에는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하지 않았다는 사실(백제의 불교공인은 384년)로 보아서 백제 영토인 강화도에 절이 세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아도화상의 창건이라는 전설을 부연시킨 후대의 윤색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1366년(공민왕 15)에 제작된 연기(年記)를 지닌 향로에는 ‘진종사’라는 절 이름이 보이고 있어 단정적으로 부정할 수 만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향로는 일제시대 때 반출되어 1910년에는 이왕가(李王家) 박물관에 소장되었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사찰 측의 전설에 의하면 이 절의 이름 전등사는 왕비 정화궁주가 옥등을 이곳에 시주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고쳐 전등사라 했다는 것입니다. 혹은 당시 고려 불교계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조계선종의 법맥과 종지(宗旨)를 천명하는데 필수적인 책이었던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의 이름에서 기인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할 뿐 단정을 내릴 수 없는 실정입니다. 조선시대 때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을 거치면서 전등사는 국가적 기여로 인해 그 위상이 한층 높아졌으며 1660년(현종 즉위년)에는 강화유수이며 선조의 외손자였던 유심이 이곳 전등사 경내에 선원각과 장사각을 지어 왕실세보와 문적 그리고 역대 조종의 실록을 이곳으로 이관보장할 계획을 세웁니다. 1678년(숙종 4)에는 서울의 춘추관과 성주, 그리고 충주사고에 보장되어 있던 왕조실록이 왜란으로 소실되자 전주사고본을 마니산 사고로부터 정족산 사고인 장사각으로 옮겨 보관하게 되며, 아울러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한 왕실관계 문적들도 선원각에 보관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1734년(영조 10)에는 선두포의 곡식 수십 석을 하사 받기도 하며, 경기서부 일대의 사찰을 관장하는 수사찰의 지위를 확보합니다. 이러한 사중의 대외적인 일 뿐만 아니고 사중에는 영조의 시주에 힘입어 중창불사가 이루어지는데 대조루가 건립된 것도 이때의 일입니다. 한일합방 이후의 전등사는 강화와
개성 등 6개 군에 소재하는 34개 사찰을 관리하는 본사로 승격되었는데
이것은 1911년 6월 3일에 새로운 체제로 개편된 사찰령에 따른 사찰령시행규칙이
반포된 것에 기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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