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탈춤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 


봉산탈춤 

봉산 탈춤은 해서일대에 분포된 탈춤 중의 하나이다. 해서 탈춤의 분포를 보면 사리원, 봉산을 중심으로 황주와 서쪽 평야지대인 안악·재령·신천·장연·송화·은율등지의 탈춤과, 동남쪽 평야지대인 기린·신원·서흥·평산·신막등지의 탈춤과 해안 지대로는 해주·강령·옹진·송림·추화·금산·연백등지의 탈춤으로 크게 셋으로 구분되며, 5일장이 섰던 거의 모든 장터에서 탈꾼들을 초빙하여 1년에 한번씩은 놀았다고 한다. 이러한 분포로 보아 해서 탈춤은 거의 황해도 전지역에서 놀던 탈춤으로 그 중에서 특히 봉산 탈춤이 대표격으로 된 것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일이며, 일제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라고 한다.

 산대놀이가 비교적 전업화된 놀이로서 관의 행사와 보다많이 관련된 것에 비하면 봉산 탈춤 등 황해도 탈춤은 주로 농민과 장터의 상인들을 상대로 한 놀이였지만, 역시 원님의 생일이나 그 부임날과 같은 관아의 경사와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놀이로도 특별히 연회되었다. 다른 군과의 연희 경연에는 5월 6·7·8일에 해주감영에 나가서 놀았고, 우승하면 감사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고 한다.

 봉산탈춤은 원래 봉산 구읍 경수대- 지금의 봉산군 동선면 길양리에서 연희되었으나, 1915년경 군청 등 행정기관이 사리원으로 옮겨가고, 경의선철도가 개통되자 이놀이도 사리원으로 옮겨져 경암산 아래에서 행해졌다.

 
봉산 탈춤의 내용은 양주별산대놀이와 비슷하며, 과장은 크게 7과장으로 나눌 수 있다. 제1과장은 사상좌춤, 제2과장은 팔목중춤(제1경 목중춤, 제2경 법고놀이), 제3과장 사당춤, 제4과장 노장춤(제1경 노장춤, 제2경 신장수춤, 제3경 취발이춤), 제5과장 사자춤, 제6과장 양반춤, 제7과장 미얄춤이다. 이중에서 팔목중·사당춤·사자춤 과장이 양주 별산대놀이와 다르나, 김진옥의 증언에 의하면 양주 별산대놀이와 마찬가지로 제2팔목중춤 과장에 '법고놀이'가 있었고, 제6양반춤 과장에 포도부장이 나오기도 하였다고 하니 동일한 산대도감 계통의 탈춤에서의 분파임을 더욱 확실하게 한다.

 연희자는 모두 남자였고, 그것도 그 지방 이속들이었으므로 사회적으로 그리 천시되지 않았고, 그 연기가 세습되어 왔는데, 1920년대에 들어서 기생조합이 생긴 후로 남자 대신 기생들이 상좌와 소무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사리원으로 옮겨오기 전에 봉산 탈춤을 놀았던 경수대는 앞산 밑 강변의 평평한 터로 석벽 밑에 겨우 무릎이 닿을 높이의 돌축대를 쌓은 것이며, 그 나지막한 축대 위에서 사방에 횃불을 밝히고 놀았다. 반면 사리원의 가설무대는 경암루 앞 광장에 28개의 구획을 가진 반원형의 다락을 세우고, 그 안마당에 멍석을 깔아 탈판을 마련하였다. 이 28개 다락 중 탈판 오른쪽 제3의 구획이 탈막청으로 쓰여졌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경암루 뒤를 탈막으로 쓰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반원형 2층 관람석 다락의 사용권은 공연비용을 대는 상인들에게 주어 그들이 단골손님을 초대하거나 음식을 사먹는 사람에게 한해서 자리를 주게도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놀이에 사용되는 비용을 따로 입장료를 받아서 채우지 않고, 읍민 중 유지와 상인들에게 염출했던 것이다.